세계의 차축시대의 학문과 종교 중에 유학처럼 ‘배움’(學)을 강조한 종교가 없어 보인다. 小學과 大學이 있는가 하면 논어는 배움의 기쁨(悅)으로부터 시작한다. 공자는 15세가 되면 배움에 뜻을 둔다(志于學, <위정>, 4), 라고 말한다. 주자에 따르면 공자가 실제로 뜻을 둔 것은 성인이 되는 것이었다(以聖人爲志). 성인에 뜻을 둔 공부인지라 글을 기억하거나 외우며 문장을 잘 짓는다거나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출세하는 것이 공부의 목표가 아니다. 유학의 배움은 “배워서 성인에 이르는 방법이다”(學以至乎聖人之道也, <옹야>, 2 註)
성경에서의 배움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신 5:1)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신 31:13)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 17:19).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시 119:73)
유학에서의 배움도 가히 경건한 행위다. 성학십도의 마지막 제10도인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에서 퇴계는 “이에 책을 펴고 성현을 마주 대하면, 공자께서 앞에 앉아 계신 듯, 안자 증자가 앞뒤로 앉아 있는 듯”乃啓方冊對越聖賢 夫子在坐 顔曾後先)하다고 말한다. 제9도인 경제잠도(敬齋箴圖)에서는 하느님 앞에서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것 같다. “의관을 바르게 하고 바라보는 시선을 존엄하게하며,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혀 거처하면서 상제를 마주 모신 듯이 하라(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
공자에게서 학은 자기완성을 위한 가장 유일하고 확실한 길이다. 불교의 깨달음이나 기독교의 신앙에 의한 구원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유학은 배움을 통해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배우기를 좋아(好學)해야 한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군자(君子)다. 호학에는 마음이 지향하는 곳(心之所之)과 함께 감성의 자발성이 들어 있다.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미색을 좋아하는 마음(賢賢易色)으로 하듯이 학문을 이와 같이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전을 공부하는 자발성과 기쁨은 성경에도 해당한다. 시편에도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주님의 율법과 계명과 가르침은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다. 그래서 주님의 교훈을 따를 때 기쁨이 생기며(시 119:14), “주님의 율례가 나의 노래”(시 119:54)이며, “내가 주님의 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온종일 그것만을 깊이 생각”(시 119:97)하고, “주님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도 단지요? 내 입에는 꿀보다 더 달다”(시 119:103). 주님의 증거는 내 기쁨이기 때문에 나는 “주님의 말씀 묵상하다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시 119:148)한다.